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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칠성사가 있습니다. 
      칠성사는 세례, 견진, 성체, 고해, 병자, 성품, 혼인 성사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글/ 서철 바오로 신부 / 선교사목국장

 

 

  주님께서 너희에게 먹으라고 주는 양식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를 탈출해 가나안 땅에 이르기까지 40년 동안 하느님께서 주시는 음식으로 살았습니다. 이집트를 떠난 후 광야에서 배가 고프자 이집트가 '죽음의 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고기 냄비 곁에 앉아 빵을 배불리 먹던 그때를 떠올리며 불평을 터뜨립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 "나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불평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들에게 이렇게 일러라. '너희가 저녁 어스름에는 고기를 먹고, 아침에는 양식을 배불리 먹을 것이다. 그러면 너희는 내가 주 너희 하느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날 저녁에 메추라기 떼가 날아와 진영을 덮었습니다. 그리고 아침에는 진영 둘레에 이슬이 내렸는데, 이슬이 걷힌 뒤에 보니, 잘기가 땅에 내린 서리처럼 잔 알갱이들이 광야 위에 깔려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보고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것이 무엇인지 몰라, "이게 무엇이냐?"하고 서로 묻자, 모세가 그들에게 말해 줍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너희에게 먹으라고 주신 양식이다."(탈출 16,12-15)

 

  그리스도의 몸이 된 우리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실 나는 주님에게서 받은 것을 여러분에게도 전해 주었습니다." 곧 주 예수님께서는 잡히시던 날 밤에 빵을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또 만찬을 드신 뒤에 같은 모양으로 잔을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이잔은내피로맺는새계약이다. 너희는 이잔을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사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여러분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적마다 주님의 죽음을 전하는 것입니다.(1코린 11,23-26) 이렇게 우리는 매일 미사를 봉헌하고 성체를 받아 모실 때마다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증언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체를 받아모신 우리는 한 몸을 이루는 것입니다. "빵이 하나이므로 우리는 여럿일지라도 한 몸입니다. 우리 모두 한 빵을 함께 나누기 때문입니다."(1코린 10,17)

 

  예수님의 몸을 다시 살려내는 신비체
  빵 나눔. '그리스도이신 오직 하나의 생명의 빵을 나눔으로써 영성체에 참여하는 모든 이가 한 몸을 이룬다.' 그저 역할이 나누어 진 물적 지체가 아니며, 그저 활동을 위한 몸체가 아닙니다. 공동체가 '아멘'이라고 응답하며 받아 모신 예수님의 몸과 피를 다 모아내면, 온전한 그리스도의 몸이 됩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이루어 낸 그리스도 몸의 머리이신 것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인을 살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성체성사로 늘 새롭게 살아난 신비체인 것입니다. 그러하니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살도록 되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아니라 '우리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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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너희의 하느님이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다.

 

 

  이스라엘 자손들의 온 공동체는 신(zin) 광야에 이르렀다.
그들이 이집트 땅에서 나온 뒤, 둘째 달 보름이 되는 날이었다. 이스라엘 자손들의 온 공동체가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에게 불평하였다. "아, 우리가 고기 냄비 곁에 앉아 빵을 배불리 먹던 그때, 이집트 땅에서 주님의 손에 죽었더라면! 그런데 당신들은 이 무리를 모조리 굶겨 죽이려고, 우리를 이 광야로 끌고 왔소?"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하늘에서 너희에게 양식을 비처럼 내려 줄 터이니, 백성은 날마다 나가서 그날 먹을 만큼 모아들이게 하여라."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라
  『"너의 하느님은 나 주님이다. 바로 내가 너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하느님이다. 너는 내 앞에서 다른 신을 모시지 못한다. 너는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 위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어떤 것이든지 그 모양을 본떠 새긴 우상을 섬기지 못한다. 나는 질투하는 신이다. 나를 싫어하는 자에게는 아비의 죄를 그 후손 삼대에까지 갚는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여 나의 명령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그 후손 수천 대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은 사랑을 베푼다. 엿새 동안 힘서 네 모든'생업'에 종사하고 이렛날은 너의 주 하느님 앞에서 쉬어라."(출애 20,2-10)』
  하루를 온전히 생업, 즉 하던 일을 멈추고 하느님 앞에서 쉬지 않으면 죽습니다. 우리의 욕망은 한순간도 쉼 없이 세상의 유혹에 열려 있습니다. 인간이 세상으로부터 들어 온 욕망을 스스로의 힘으로 다스리기는 어렵습니다. 그 욕망은 우리의 눈을 멀게 하여 빛을 막으며, 귀를 닫게 하여 하늘의 소리를 들을 수 없게 합니다. '하늘의 소리'는 우리 안에 깊숙이 자리한 갈망을 비춥니다. 하느님을 향한 그 갈망은 죽
어가는 모든 것들의 생명을 싹트게 하는 힘입니다. 하느님은 배신의 두려움에 사로잡힐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다 지나갈 것이다. 다 괜찮아질 것이다. 집으로 오너라."우리의 집은 하느님입니다.

 

  선생님, 제가 무슨 일을 해야 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젊은이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서 나를 따라 오너라."(마태 19,21) 우리가 가진 모든 것들은 죽은 자들에게서 얻어진 것입니다.
  죽은 것들을 버리지 않는 한 삶의 길로 갈수는 없기에 두고 따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것은 죽어가는 자들을 살리기 위해 쓰여지도록 해야 하기에 모두 나누어주어야 합니다.
  "누구든지 나에게서 떠나지 않고 내가 그와 함께 있으면 그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요한 15,5)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의 신비에 참여하며, 그분의 계명을 지킨다면, 예수님께서 몸소 우리 안에서 사랑으로 말미암아 우리 삶의 살아 있는 내적 규범이 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거룩하신 분이시니 그 분이 사랑하신 아들 예수님께서도 거룩하시니,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 또한 거룩해지는 것은 너무나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완전한 사람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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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찬, 내가 너희에게 본을 보여 준 것이다

 

 

  『파스카 축제가 시작되기 전,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아버지께로 건너가실 때가 온 것을 아셨다.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당신 손에 내주셨다는 것을, 또 당신이 하느님에게서 나왔다가 하느님께 돌아간다는 것을 아시고, 식탁에서 일어나시어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들러 허리에 두르셨다. 그리고 대야에 물을 부어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고, 허리에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 시작하셨다.(요한 13,1-5)』

 

  성찬의 예식을 제정하시다
  『시간이 되자 예수님께서 사도들과 함께 자리에 앉으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고난을 겪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파스카 음식을 먹기를 간절히 바랐다.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 주는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또 만찬을 드신 뒤에 같은 방식으로 잔을 들어 말씀하셨다.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루카 22,14-20)』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사랑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몸인 생명을 내어 주신 것처럼 '내어줌'이며, 또 제자들의 발을 몸 굽혀 씻어주신 것처럼 '섬김'입니다. 그러한 내어줌과 섬김의 자리에 매일 우리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이 성찬에 초대받은 사람은 복되도다.
  예수님이 우리의 몸 안에 들어오시면 우리는 그 분의 힘으로 죄를 멀리 합니다. 그 분이 내 안에서 그 분의 눈으로 사람들을 보고, 그 분의 귀로 사람들의 말을 듣고, 그 분의 입으로 사람들을 말하니 우리는 그 분과 함께 하느님과 연결됩니다. 하느님과의 연결을 통해서 세상 모든 생명들과도 연결됩니다. 그리하여 세상의 모든 아픔은 우리 모두의 아픔이며, 세상의 모든 사람들의 기쁨은 곧 우리의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의지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기에 하느님 스스로 사랑하는 아들의 몸을 통해 이루어 내시는 생명입니다.

 

  당신이 초대하는 '미사'에 가고 싶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따라 오는 두 사람에게 돌아서시어, "무엇을 찾느냐?"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라삐(스승님),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보아라."하시니, 그들이 함께 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날 그분과 함께 묵었다.(요한 1,38-39)』
  미사는 하느님과 사람이 나누는'사랑의 대화'입니다. 하느님은 말씀하시고 사람은 노래합니다. 하느님과 선택된 백성간의 약속을 이야기 한 구약성경을 읽고나면, " 하느님 감사합니다."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하신 예수님의 이야기를 기록한 신약성경을 낭독 하면,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감사와 찬미로 이루어진 나의 봉헌, 온전히 봉헌된 자에게 내리는 성체, " 그리스도의몸."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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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사랑을 기억하여라!

 

 

  어린 시절 병약하여 친구들이랑 뛰어놀지 못하고, 대청마루에 앉아 먼 산을 보는 날이 많았습니다. 그렇게 오후 시간을 보내고 나면 저 멀리서 나를 부르는 한 소리가 들려옵니다. "내 장손자 어디 있나?" 할머니의 목소리입니다. 동네 남의 일을 가셨다가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손자를 부르는 목소리입니다. 그 목소리를 알아듣고 반가운 마음에 대문을 향해 걸어나가면 할머니가 달려오시면서 오른손 엄지손가락을 펴드시고"내 장손자가 이 세상에서 최고지!"하십니다. 그리고는 두 손을 펴 어린 손자를 덥석 끌어안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안아주신 다음 몸빼 바지의 주머니를 뒤적여 빵 하나와 요구르트 한 병을 꺼내주시면서 먹으라 하십니다. 처음에는 할머니 드시라 해보았지만 '나는 많이 먹었다'며 손사래를 치시고는 빨리 먹어보라 하십니다. 봉지를 뜯어 빵을 한 입 베어 물면 빵 내음이 코로 밀려들고, 단팥의 촉촉함과 단맛이 입 안 가득히 퍼집니다. 그리고 요구르트를 마시면 달달하면서도 시큼함이 그동안 친구들과 함께 뛰어놀지 못해 가지고 있던 아쉬움을 모두 잊어버리게 해주면서, 이 세상에 나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만들어줍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성체를 모시고 자리로 돌아와 앉으면 먼저 떠오르는 말씀이 있습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너는 최고다. 너는 나의 사제이다." 먼저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 1,11)라는 말씀은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갈라지고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오시고 들려온 소리입니다. 세례를 받은 우리는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하느님으로부터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이 소리와 더불어 할머니가 해 주신'내 장손자가 최고지!'하는 말씀이 함께 어우러집니다. 그러면서 그런 말씀을 해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
  감사의 인사를 드린 후 생각하는 것은 '하느님이 사람이 되시고, 그 사람이 되신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당신의 몸과 피를 내어주기까지 사랑하셨으니,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입니다. 제가 청주대학교 담당 신부를 일 년정도 담당한 시간이 있었습니다. 유학을 가게 되어 기념으로 선물을 주고 싶다고 하자 담당 수녀님이 대학생연합회 미사에 쓸 '성작'이 필요하다고 하였습니다. 사제에게 아버지 신부님으로부터 받은 '서품성작'은 평생을 간직하는 중요한 선물이지만, 선뜻 내어줄 수 있었던 것도 평소에 늘 제 스스로에게 던지는 '사랑받는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하는 물음에 있지 않았나 여겨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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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왜 고해성사에서 죄의 횟수를 말하는가?
  대학원 과정의 마지막 종합시험에서"왜 고해성사에서 죄의 횟수를 말하는가?"하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사제지만 신앙생활을 한 이후에 이런 질문은 처음이었습니다. 첫영성체 후부터 습관적으로 해오던'무슨 죄를 몇 번 지었습니다'하던 모습만 떠오를 뿐 답을 할 수 없었습니다. 긴장된 상태에서 시간만 흐를 뿐 머릿속은 하얘졌습니다. 결국"모르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후에 고해성사에서 횟수가 가지는 의미를 따져볼 수 있었습니다. 고해실에서 죄의 항목과 횟수만을 말하고, 고해실을 나서면 내 생활에 아무런 변화도, 내 마음의 비움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단지'해야 할 의무를 했구나'하는 안도감만이 잠시 주어질 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횟수를 헤아리는 동안 그렇게 매번 반복적이고 습관적으로 행하는 잘못의 이유가 무엇이고, 그로 인해 받는 마음의 아픔이 무엇인지를 깊이 따져봐야하는 것입니다. 우선 그 이유 때문에 생겨난 아픔에 대해 그 사람과 그 장소와 그 시간 속에서 있었던 모든 사실을 있는 그대로 충실하게 하느님 앞에서 이야기할 수 있을 때'성찰'을 제대로 거친 것이고, 성찰에 따라'통회'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집니다. '우리 스스로 고백을 한다'는 것은 굉장한 의미입니다.

 

  온종일 신음 속에 뼈만 녹아납니다.
  다윗 임금이 자기 부하 장군 우리야의 아내와 간통을 하고, 그 죄를 숨기고자 우리야 마저 살해하는 엄청난 죄를 짓고난 후 자신의 죄를 뉘우치며 이렇게 기도합니다.
  『"복되어라, 거역한 죄 용서받고 죄허물 벗겨진 자, 야훼께서 잘못을 묻지 않고 마음에 거짓이 없는 자. 나 아뢰옵지 않으렸더니 온종일 신음 속에 뼈만 녹아나고, 밤낮으로 당신 손이 나를 짓눌러 이 몸은 여름 가뭄에 풀 시들듯, 진액이 다 말라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당신께 내 죄를 고백하고 내 잘못 아니 감추어"야훼여, 내 죄 아뢰옵니다."하였더니, 내 잘못 내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당신을 굳게 믿는 자 어려울 때에 당신께 기도하리이다. 고난이 물결처럼 밀어닥쳐도, 그에게는 미치지 못하리이다. 당신은 나에게 은신처, 내가 곤경에 빠졌을 때 건져주시어 구원의 노래 속에 묻히게 하셨습니다."』(시편 32, 1-7)

 

  하느님께로 더 가까이
  세상 속에서 들어온 근심과 불안과 슬픔과 기억, 모든 것을 걷어낼 때'화해'가 가능합니다. '걷어냄'은 일상 속에서 매순간 예민함을 잃지 않을 때입니다. 우리 마음은 매순간 하느님 마음에 닿고 싶어 합니다. 하느님께 돌아서서 마음을'놓으면'하느님 사랑이 내 안에 들어와 작용하십니다. 피조물을 당신 사랑의 행위로 창조하셨기에 누구보다도 우리를 더 잘 아시고, 내 일상의 예민함 안으로 들어오셔서 나를 움직이실 수 있습니다. 한 순간도 쉼없이 나를 바라보시고 비추어 주시기에 그 분의 길을 따라 걸을 수 있습니다. 나는 완전하지 못하기에 비추심을 통해 부족함을 채워주시는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것이 은총임을 매순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면 내 삶은 점점 하느님 스타일이 되어 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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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은 존재를 위치 지우노니

 

 

제목 없음-1.jpg   '고백'이라는 스스로의 표현 행위는 하느님께서 마련해주신 복된 자리로 되돌려지기 위한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하느님 사랑의 응답으로서 맡겨진 행위인 만큼 남겨진 것이 없어야하고, 숨겨진 것 또한 없어야 합니다. 조금이라도 가려진 것이 있다면 가려진 만큼 고통의 근원이 됩니다. 하느님은 사람들이 고통 속에서 살기를 바라지 않으십니다. 사람들의 고통의 원인이 되는 모든 것을 스스로 고백하여, '사함'을 통해 늘 기쁘고 감사하며 살기를 간절하게 바라시는 것입니다.

 

  인간은 나약합니다.
  『"나는 내가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나는 내가 바라는 것을 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싫어하는 것을 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그런 일을 하는 것은 더 이상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죄입니다. 사실 내 안에, 곧 내 육 안에 선이 자리 잡고 있지 않음을 나는 압니다. 나에게 원의가 있기는 하지만 그 좋은 것을 하지는 못합니다.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 그래서 내가 바라지 않는 것을 하면, 그 일을 하는 것은 더 이상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자리 잡은 죄입니다. 여기에서 나는 법칙을 발견합니다. 내가 좋은 것을 하기를 바라는데도 악이 바로 내 곁에 있다는 것입니다. 나의 내적 인간은 하느님의 법을 두고 기뻐합니다. 그러나 내 지체 안에는 다른 법이 있어 내 이성의 법과 대결하고 있음을 나는 봅니다. 그 다른 법이 나를 내 지체 안에 있는 죄의 법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로마 7,15-25)』

 

  나약함이 사랑을 품어 내니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주일미사 몇 번 빠졌습니다."그렇게 고백하고 보속을 받고 성사의 자리를 끝낸다면, 그 행위는 늘 반복됩니다. 주일은 하느님께서 그를 믿는 자들을 거룩하게 하고 복되게 하려고 마련해 놓으신 시간입니다. 그 시간을 지키지 않는 다면 우리는 매순간 죽어가는 삶을 살아야 하기에 우리를 살리기 위해 마련하신 것입니다.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스승님을 따르겠노라고 대답한 청년에게 예수님은"죽은 자의 일은 죽은 자들에게 맡겨라."하십니다. 주일을 거르고 세상살이에 임하면'죽은 자'로 살기 십상이며, 죽은 자의 마음은'죽은 마음'일 수 밖에 없습니다. 죽은 마음은'무정한 마음'이며, 무정한 마음은'언제라도 생명을 죽이는 무기'가 될 수 있습니다. 주일 미사를 거름은 하느님의 부름에 등을 돌리고, 세상의 손짓에 고개를 돌린 것입니다. 죄는 하느님께 등을 돌린 것이니'죽음'을 불러올 수밖에 없습니다. 뼈가 무너나듯'남김없이 숨김없이'말하고 나면, 다 비워진 그 나약함 속에 하느님과 예수님이 이루신 완전한 사랑 곧 성령이 들어옵니다. 그것은 곧바로 이어지는'죄의 사함'입니다.
  그렇게 파견된 우리는 하느님 사랑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고, 하느님 사랑의 손길로 이웃을 어루만지고, 하느님 사랑의 마음으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를 끌어안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러하신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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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의 매듭을 풀어 준 당신

 

 

  고해성사를 다한 아이가 사제에게 들려주었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고통을 느끼고 있었어요. 나의 고통이 예수님의 고통이 되었어요. 예수님은 나와 똑같은 고통을 느끼고 있었어요. 그것을 느끼는 순간 내 아픈 가슴의 한가운데로 빛이 흘러들어왔어요. 마음 깊은 곳으로 흘러들어오는 빛은 영롱했어요. 그것은'사랑의 빛'이었어요. 예수님이 나의 고통을 느끼는 것은 사랑 때문이었어요. 나는 꼼짝하지 않고 예수님의 얼굴을 마주 보았어요. 아픔으로 꽉 채워진 가슴 속에서 사랑이 생겨나고 있었어요. 사랑에 휩싸인 나는 나이기도 했고, 내가 아닌 것 같기도 했어요. 내 영혼을 피폐하게 한 것은 고통이 아니었어요. 고통 속에 숨겨진 적의였어요. 그 적의가 예수님의 씻김을 통해 사라졌어요. 적의가 사라진 곳에 슬픔이 고였어요. 놀랍게도 슬픔은 고통을 감싸 안았어요. 어머니가 나를 품어 안 듯. 예수님은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나를 아셨고, 내가 태어나는 순간 나를 가장 먼저 안으셨으며, 내가 숨을 쉬는 동안 한시도 내게서 눈길을 떼지 않으실 것이며, 내가 숨을 거두는 바로 그 순간 나를 품에 안아 하늘로 오르시리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마음이 환하고 등이 뿌듯한 느낌이었어요."

 

  보속은 벌을 기워 갚는 것입니다.
  죄는 결국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고 나약하게 하며, 하느님께 대한 관계, 이웃에 대한 관계를 해칩니다. 따라서 고해성사를 통해 죄는 용서받지만, 죄의 결과로 생긴 모든 폐해를 고쳐 주지는 못합니다. 따라서 죄에서 벗어난 사람은 완전한 영적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가능한 일들을 해야 합니다. 죄를 갚기 위해서 무엇인가를 더 실행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적절한 방법으로 죄를 보상하거나 속죄하는 것을'보속(補贖)'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고해사제는 고백자에게 보속을 정해 줄 때, 그 사람의 개인적인 상황을 고려하고, 그의 영적 이익을 도모합니다. 그래서 보속은 세상과의 관계를 회복시켜 주는 헌금, 희생, 절제와 단식, 이웃과의 관계를 회복시켜주는 이웃을 위한 봉사와 자선, 그리고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키는 기도 등으로 이루어집니다.

 

  차마 할 수 없었던 외면 같은
  우리들의 보속은'상대방을 용서하고자 하는 행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내 마음에 새겨진 상처를 씻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지금 상처를 씻지 않으면 미래의 어느 시간에는 그 상처가 사람을 죽이게 될 것입니다. 상처가 지닌'독의 작용'입니다. 그러니까 나의 보속을 위한 기도는 내 마음에 고통을 주어 미워하게 하거나 분노하게 하거나 원망하게 한 사람을 위한 기도이면서 또한 나를 위한 기도이기도 합니다. 이것을 알게 되면 숨김없이 한 고백을 통해 이런 기도를 보속으로 받을 수 있도록 한 그에게 깊이 감사하게 됩니다. 나의 기도에는 그의 생애가 깊숙이 관여하고 있습니다. 그가 살아오면서 이룬 선의 축적이, 혹은 그가 겪었던 고통의 축적이 나와 만날 수 있는 계기로 작용해서 나에게 기도하는 순간을 맞도록 한 것입니다. 보속을 끝내고 나면 단 하나의 마음만 오롯이 남습니다. 그것은'하느님의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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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해자와 사제의 간극(間隙)

 

 

  예전에 외국 신부님께서 본당신부님으로 계실 때의 일입니다. 미사 전 고해성사를 주시다가는 갑자기 고해소에서 나오셔서는 옆문을 벌컥 여시고 무릎을 꿇고 있는 신자의 손을 잡아 끌어내면서 큰 소리로"수~녀님, 이 신자 고해성사 보는 법 좀 다시 가르치세요!"하셨답니다. 그 신자분은 크게 당황하여 얼굴은 빨갛게 변하고 어찌할 바를 몰라 쩔쩔매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막상 고해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여러 번 생각하고 준비했던 것들이 사라져버린 순간들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던 경험들이 많이 있을 법 합니다.

  주일미사를 빠진 날부터 이미 고해성사는 시작됩니다. '마음으로부터의 불편함이 시작된다'는 의미에서 그렇습니다. 그 불편함은'고해성사 해야지.'하는 마음가짐으로 출발해서 고해실 문을 바라보며 여러 번 반복되는 망설임으로 이어집니다. 다음 미사에서 바로 고해성사를 하지 못하면 미사를 드리는 것에서도 마음의 갈라짐은 피할 수 없고, 영성체 시간에 그냥 앉아있어야 하기에 편안한 자세가 되지 않는 것까지 그 불편함은 이어집니다. 그것은 성당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무겁게 하기도 합니다. 이 모든 과정이 고해성사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안타까움의 시간들을 견디고 고해실의 문을 여는 순간 긴장되기도 하지만 내 안에 스며드는 안도감, 그것으로 이미 다 말하지 못한 표현은 다 한 것으로 여겨져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경험 탓인지 사제가 되어 첫 고해성사를 집전하던 날, 하느님의 은총으로 죄를 사해 준다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가끔 어린이들과 함께 뛰어 놀다가 고해소로 들어가면 졸리울 때도 있었고, 더운 여름날 고해소의 찜통더위나 한 겨울의 추위가 있어 힘들 때도 있었지만 고해성사를 준다는 것은 언제나 보람된 일이었습니다. 할머니들의 반복적인 죄 고백이나 어떤 이의 성찰 없는 죄고백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사죄경을 읽고 보속을 주고 나면 고해실에서 들었던 모든 이야기들이 하얗게 사라지는 현상도 아름다운 은총이었습니다. 이 아름다운 은총의 경험을 나눌 수 없는 사제는 신자들이 자신을 알까봐, 아니 자신의 고해 내용을 기억할까봐 부담스러워하고 냉담의 이유가 되기도 한다는 것에 마음이 아팠습니다.

  미사 전에 바쁘게 고해성사를 해야 하기에 충분히 자신의 이야기를 나누기는 어렵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결과보다는 과정의 이야기가 더 길기에, 그 긴 이유들을 하느님과 충분히 이야기해 보는 것은 어떨는지요? 본당 신부를 하면서 신자들에게 마음에 무거운 것이 있으면 하느님 앞에 마음을 털어놓는, 자신의 괴롭고 분한 마음을 하소연하는 소리기도를 많이 해야 한다고 말해주곤 했습니다. 그런데 신자들의 고해 내용을 들어보면 이 소리기도를 할 줄 몰라 마음에 여러 감정의 찌꺼기들이 남아 괴로워하고 있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우리나라의 많은 신자들이 자신의 감정을 충분히 표현하고 드러내기보다는 그저 참고 인내하는 것이 미덕이라고 배워 온 터에 하느님 앞에서조차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익숙하지 않겠지요.

  '충분한 의사소통'이 우리의 가슴을 트이게 하고, 그 트임으로 인해 밝음이 얼굴에 드러나고, 그 밝음은 살아있는 인간이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그 어떤 것도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고, 그저 생기지 않는 것이기에 하느님 앞에서 말하는 것도 매일 연습하여 몸에 쌓일 때 자연스러워질 것입니다. 그리하면 사제 앞에서 하는 고백도 내 삶의 고통을 나누는 것이기에 고해성사가 둘 사이의 간극(間隙)을 벌이는 것이 아니라 다가서는 아름다운 생활의 일부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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