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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성모병원 체험수기 공모전 대상 수상작 <동반과 동행, 그 어디 쯤/ 김정자>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3-03-24 조회수 : 906

청주성모병원 체험수기 공모전 대상 수상작

 

<동반과 동행, 그 어디 쯤/ 김정자>

 

따르릉~”

전화 한 통.

내 삶을 뒤흔들기에 전화 한 통이면 충분하였을까.

새봄을 기다리던 19992월 어느 날.

설날 동네 어르신들에게 새해 인사드리러 길을 나서셨던 아버지와 어머니는 찻길 하나를 건너지 못하시고 달려오는 트럭과 부딪히셨다.

청주성모병원과의 동반은 이때부터 시작이었다.

응급실에 도착해서 본 어머니와 아버지 모습에 내 가슴은 부서져 버렸다. 어머니는 피 묻고 찢겨진 옷을 입고 의식을 잃으신 채로, 아버지는 오른쪽 다리가 부서진 채로 누워 계셨다.

의사 선생님께서 아버님은 다리를 많이 다치셨습니다. 무릎 위까지 다리를 절단하든지 아니면 급히 뼈 이식 수술을 해야 합니다. 어머님께서는 뇌를 다치셨는데 현재 의식이 없는 상태이고 대퇴골도 부서져 대퇴골 수술을 해야 합니다. 두 분 모두 당장 수술을 해야 합니다. 보호자 수술 동의서 작성해 주세요.”

갓 스물 한살, 대학교 2학년생이었던 나는 서서 밀어닥치는 커다란 파도 아래 가랑잎 같았다. 부모님을 두 분 다 잃을 수 있다는 두려움과 당혹감으로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아직 중학생인 어린 남동생과 나, 응급실에 누워 계시는 부모님, 우리 네 식구는 한 줄기의 빛도 비춰지지 않는 어둠 속에 그렇게 내던져졌다.

저녁 7시 경에 시작된 수술은 긴 밤을 새우고 아침이 되도록 계속되었다.

수술실 앞에서의 기다림은 길고 길었다.

제발 우리 부모님 살려주세요. 착하고 착하기만 한 우리 엄마, 아빠 제발 살려주세요. 엄마, 아빠 살려만 주시면 시키시는 거 모두 다 할게요.”

부모님만 살릴 수 있다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다고 세상 가장 간절한 기도를 바치고 또 바쳤다.

부모님의 생사의 갈림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의사선생님을 믿고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지금도 수술대 앞에서 긴 시간동안 부모님을 살리시기 위해 고생하셨을 의료진 선생님들을 생각하면 감사함의 눈물이 난다.

12시간이 넘는 수술 시간을 견디고서야 어머니는 신경외과 중환자실로, 아버지는 외과 중환자실로 옮겨지셨다. 아버지는 중환자실에서 한 달 정도 계시다 병동으로 옮겨지셨다. 어머니는 혼수상태로 중환자실에 3개월 계셨는데 3번의 응급 상황이 있었고 그때마다 심폐소생술로 생사의 갈림길을 왔다 갔다 하시다 기적처럼 의식을 찾으셨다. 어머니의 의식이 돌아오길 기다리던 3개월은 너무나 고통스럽고 애간장이 타는 시간이었다.

이후 어머니는 6층 신경외과 병동에서, 아버지는 7층 정형외과 병동에서 10개월간 입원 치료가 진행되었다. 휴학을 한 나는 6층과 7층을 하루에도 수십 번 오르락내리락 했다.

다리 절단을 완강히 거부하셨던 아버지께는 여러 번의 뼈 이식 수술과 피부 이식 수술을 하시며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묵묵히 조용한 눈물로 견디셨다.

어머니는 석션suction을 하고 콧줄과 소변줄을 끼웠다 제거했다 하는 과정이 계속되었고 무엇보다 뇌 손상이 심하여 재활 치료가 급했다. 지적 기능도, 감정 표현도, 육체적 기능도 모두 잃어버리신 어머니는 하나부터 열까지 한순간도 한눈을 팔아서는 안 되는 갓난아기가 되었다.

나는 6층과 7층 사이의 계단에 앉아 많은 날을 눈물로 보냈다.

어떤 날은 슬퍼서, 어떤 날은 화가 나서, 어떤 날은 억울해서, 어떤 날은 너무 힘겨워서 울었고 또 어떤 날은 내 부모의 통증과 고통을 나눌 수 없다는 절망감과 불쌍한 내 삶과 어둡기만 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 짓눌려 울었다.

기나긴 병간호로 힘들 때 위로의 말씀을 건네시던 간호사 선생님, 환자의 고통에 진심으로 마음 아파하시던 의사 선생님, 재활 치료사 선생님들의 노고는 메말라 가는 내게 생명수 같았다. 그리고 병동으로 찾아오셔서 기도해주시는 수녀님의 모습에서 잊고 있던 하느님의 존재도 생각하게 되었다.

부모님의 퇴원은 꼭 1년 만에 이루어졌다. 퇴원 후에도 통원으로 재활 치료와 작업 치료가 계속 되었다. 뇌 손상 범위가 커 재활 치료가 쉽지 않았던 어머니였지만 성모병원과 함께 했던 집중 치료로 누군가 옆에서 부축을 하고 지팡이를 짚으시면 어렵게 걸을 수 있을 만큼 회복되셨다. 여전히 몸의 균형을 못 맞춰 넘어지고 또 넘어지는 상태가 지속 되었지만 계속 연습하고 성실하게 치료를 받으며 희망을 꿈꿨다.

간절한 마음으로 치료를 받으면 원래의 우리 엄마를 다시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희망과 그건 불가능이라는 좌절감을 반복하다가 함께 숨 쉬고 살아계시는 것만으로도 감사드리자는 마음을 갖게 되었을 무렵 다시 불행은 시작되었다.

2008, 어머니는 뇌출혈이 발생하여 그 후 침상에 누워 있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하지 못했고 다시 고통이라는 이름의 긴 시간이 시작되었다. 입으로 음식을 드실 수 없어 코에 콧줄을 끼워 음식물을 삽입하고 소변줄을 끼웠다. 시간 맞춰 체위 변경을 해 드려도 오랜 병마의 시간은 어머니의 면역력을 약하게 만들었고 욕창이 생겨 썩어가고 짓물러져 가는 살을 긁어내야 하는 감당하기 어려운 통증을 남겼다. 고통스러워하시던 어머니의 신음소리가 내 귓전에 닿으면 아무 것도 해드릴 수 없는 절망감에 가슴이 뭉개졌다.

주기적으로 가정방문을 오셨던 청주성모병원 간호사 선생님의 도움은 정말 컸다. 콧줄, 소변줄을 교체해 주시고 욕창 치료를 해주셨다. 콧줄이나 소변줄이 갑자기 빠져 어려움을 겪을 때면 퇴근 후인데도 불구하고 선뜻 달려와 어머니를 돌봐 주셨다. 감사했고 감사한 만큼 죄송하기만 했다.

2010년부터 소천하신 2014년까지는 더욱 힘겨운 시간이 시작되었다. 수시로 119 구급차를 타고 청주성모병원 응급실을 찾게 되고, 자주 중환자실에 입원하고 퇴원하는 과정이 반복되었다. 치료를 마치고 집에 돌아올 때는 병원구급차를 타고 돌아왔는데, 기사님은 어머니가 이동 과정에서 아프시거나 힘드실까봐 많은 배려와 정성으로 대해 주셨다. 그 모습은 우리 가족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었다.

내 삶은 세상이 정상이라고 정의하는 삶의 궤도를 한참 이탈해서 우주를 마구 떠도는 느낌이었다. 아직 어려 목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아들을 돌이 되도록 등에 들쳐 엎고, 둘째 아들을 불룩한 만삭의 배에 담고 서도 어머니의 병간호는 멈출 수도 멈춰지지도 않았다. 향기롭기만 하던 어머니의 대변 냄새가 역겨워지고 유리창 밖 놀이터에서 한가롭게 수다를 나누는 또래 엄마들과 깔깔거리며 놀이기구를 타는 아이들의 세상은 내가 속한 세상이 아니었으므로 나는 좌절했다.

병간호의 한계로 사랑스러운 두 아들의 눈을 마주보며 환하게 웃어주지도 못하는, 늘 지치고 울상인 엄마, 불안에 떠는 엄마만을 바라보며 자라는 두 아들에게 한없이 한없이 미안했다. 남편에게도 미안했다. 신혼의 달콤함이나 가정의 편안함이란 나에게도 그에게도 허락된 적이 없었으므로.

그때였다.

내가 두 손, 두 발을 다 들고 더 이상은 버틸 수 없다는 걸 인정하던 때.

나를 구원할 존재는 하느님 밖에 없다는 걸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간절했다.

이제 나를 좀 살려달라고. 제발 더 이상 못하겠으니 나를 살려달라고 나를 위해 하느님께 빌었다. 살려달라고.

어머니는 열심하는 집안의 모태 신앙으로 태어난 개신교 신자이셨다.

천주교는 내게 여전히 생소했지만 청주성모병원 모든 가족들에게 느꼈던 따뜻함과 위로를 가슴에 품고 세례를 받아야겠다는 용기를 가졌다.

그렇게 나는 2011년에 아녜스가 되었다.

남편과 나, 바오로와 라이문도가 이루는 성가정이 된 것이다. 어머니도 하늘나라 가시기 전 대세를 받고 마리아의 이름으로 하느님 품에 드셨다. 어머니의 마지막 순간도 청주성모병원 장례식장에서 함께 했다. 청주성모병원은 마지막까지 정성스럽게 고인을 대해주시고, 장례의 모든 과정에서 진실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따르릉~” 전화 한 통으로 세상이 뒤집히던 시간부터 어머니가 하느님 품에 들어가시기까지의 시간 15. 고통이고 좌절이고 눈물이고 절망이고 희망이었던 시간 동안 청주성모병원은 내게 동반자와 동행자였다.

나는 지금 성서백주간의 시간이나 또래 엄마들의 수다 중에서 나의 지난 시간을 터 놓을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연로하신 부모님의 병간호로 힘들어 하는 친구들의 조언자도 되어 있다. 남편의 성품을 닮아 바르고 곧게 자라준 두 아들의 씩씩함을 보며 세상 부러울 것 없는 든든한 엄마이기도 하다. 그리고 나는 누가 뭐라든 하느님의 딸이다.

내가 걷고자 하는 길과 하느님께서 가라 하시는 길의 방향이 늘 같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만은 이제 나는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고 너희 길은 내 길과 같지 않다”(이사 55,8). 라는 하느님 말씀을 믿는다. 하느님은 당신의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아무런 빛이 보이지 않아도 하느님 방법으로 당신 계획을 이루신다는 것을 믿는다.

야곱이 20년이 지나서야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처럼 내게도 하느님을 찾아가는 15년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었다. 15년 동안 청주성모병원과의 동행은 하느님을 찾아가는 길찾기였다.

앞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가르침이 어리석고 비합리적으로 느껴질 때가 오더라도 나는 이제 안다. 그게 바로 하느님의 사랑법이라는 것을.

 

그동안 함께 해주신 청주성모병원 모든 가족들에게 하느님의 축복을 전합니다.

청주성모병원의 지속적인 발전을 응원하며 환자와 환자 가족들의 치유가 이루어지는 곳, 삶의 희망이 되는 곳이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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