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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가르침교황청 신앙교리부 「간청하는 믿음」(Fiducia Supplicans)의 수용에 관한 보도 자료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4-01-18 조회수 : 186

교황청 신앙교리부

「간청하는 믿음」(Fiducia Supplicans)의 수용에 관한 보도 자료

(2024년 1월 4일)


 


이 보도 자료는 「간청하는 믿음」(Fiducia Supplicans)의 명확한 수용에 도움을 드리고자 작성되었습니다. 동시에 이 ‘선언’의 의미와 목적을 더욱 잘 이해하기 위하여 선언 전문을 차분히 읽을 것을 권장합니다. 


1. 교리


「간청하는 믿음」과 관련하여 일부 주교회의의 타당한 발언들은 좀 더 긴 사목적 성찰의 기간을 가져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 주교회의들에서 표명한 내용은 교리와 상반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없습니다. 이 문서가 혼인과 성에 대해 명료하고 전통적으로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선언’에는 이에 대하여 의심의 여지를 남기지 않고 논쟁의 여지가 없는 여러 표현들이 있습니다.


“이 선언은 혼인에 관한 교회의 전통적인 교리를 확고히 견지하며, 혼란을 일으킬 수도 있는 어떤 종류의 전례 예식이나 전례 예식과 비슷한 축복도 허용하지 않는다.” 비정상적 상황에 있는 커플과 같은 이러한 상황들에서, “이들의 신분을 공식적으로 유효화하거나 혼인에 관한 교회의 영원한 가르침을 어떤 식으로도 수정하지 않은 채”(「간청하는 믿음」, 소개) 행동합니다. 


“그러므로, ‘자연적으로 자녀 출산에 열린 한 남자와 한 여자의 배타적이고 안정적이며 불가해소적인 결합’인 혼인의 본질적 구성 요소와 그것과 반대되는 것 사이에서 혼란을 일으킬 수 있는 예식과 기도는 허용될 수 없다. 이러한 신념은 혼인에 관한 항구한 가톨릭 교리에 기초하고 있다. 오직 이러한 맥락에서만 성관계가 자연스럽고 적합하며 온전히 인간적인 의미를 지닌다. 이 점에 대한 교회의 교리는 여전히 확고하다”(「간청하는 믿음」, 4항). 


“그것이 바로 교회가 동성인 사람들 간의 결합에 축복을 내릴 권한이 없다고 명시한 당시 신앙교리성의 ‘답변’의 의미이기도 하다”(「간청하는 믿음」, 5항). 


“이러한 까닭에 교회는 언제나 혼인 안에서 이루어지는 성관계만을 윤리적으로 합법적이라고 여겨왔기 때문에, 축복이 어떤 식으로든 혼인으로 추정되는 결합이나 혼외 성행위에 대하여 윤리적 합법화를 부여할 수 있는 경우, 교회는 전례적 축복을 내릴 권한이 없다는 것이다”(「간청하는 믿음」, 11항).


분명한 것은, 우리가 교리적 측면에서 이 ‘선언’을 멀리하거나, 이를 이단적이라 여기거나, 교회의 전통에 반대되거나, 신성모독적인 것으로 간주할 여지가 없다는 것입니다.


2. 실천적 수용


그러나 일부 주교들은 특히 실천적인 측면, 곧 비정상적 상황에 있는 커플에게 가능한 축복에 관하여 자신의 의견을 표명하기도 합니다. ‘선언’은 비정상적 상황에 있는 커플을(그들의 결합이 아닌) 대상으로 하는 (전례적이지 않고 예식화되지도 않은) 짧고 단순한 사목적 축복에 대한 제안을 담고 있으며, 이는 전례 형식을 띠지 않고, 이 사람들이 놓인 상황을 승인하지도 정당화하지도 않는 축복임을 강조합니다.


「간청하는 믿음」과 같은 신앙교리부 문서들은 실천적인 측면에서 지역적 상황에 따라 그리고 각 교구장 주교가 그의 교구와 함께하는 식별에 따라 이를 적용하는 데에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할 것입니다. 일부 지역에서는 즉시 적용하는 데에 어려움이 없을 것이지만, 다른 지역에서는 읽고 해석하는 데에 필요한 시간을 가지는 동안 이를 도입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일부 주교들은 각 사제가 반드시 식별 활동을 수행해야만 하고, 그럼에도 이러한 축복을 오직 사적으로만 수행할 수 있다고 규정해 왔습니다. 교황님께서 몸소 서명하시고 승인하신 본문을 마땅히 존중하며 본문 안에 담긴 성찰을 어떤 식으로든 받아들이려고 하면서 표현한 것이라면 이 모든 것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각 지역의 주교는 자신의 고유한 직무에 힘입어 항상 그 지역에서(in loco), 곧 바로 자신에게 맡겨진 양 떼이기에 그가 다른 이들보다 더욱 잘 알고 있는 구체적인 장소에서 식별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적 맥락과 현지 문화에 대한 신중함과 관심으로 여러 다른 적용 방식을 고려할 수 있지만, 사제들에게 제시된 이 길에 대한 전적이거나 결정적인 거부는 안 됩니다.


3. 일부 국가의 미묘한 상황


일부 주교회의의 경우는 그 고유한 상황 안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일부 국가에는 문화적으로 심지어 법적으로 큰 문제가 있어서, 단기적 차원을 넘어서는 시간과 사목 전략이 요구됩니다.


단순히 자신을 동성애자라고 선언하는 행위만으로 구금, 어떤 경우에는 고문이나 사형까지도 선고하는 법이 있다면, 이 경우에 축복은 신중하지 않은 일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주교들이 동성애자들을 폭력에 노출시키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교황님께서 서명하신 이 선언의 교리는 항구한 교리이므로, 이들 주교회의가 이와 다른 어떤 교리를 지지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러한 상황에서 사목적 신중함을 가지고 행동하기 위한 연구와 식별의 필요성을 권고하는 것이 여전히 중요합니다. 


실제로 동성애를 다양한 수준에서 단죄하고 금지하며 범죄화하는 나라들도 적지 않습니다. 이러한 경우에, 축복의 문제와는 별도로 중대하고 광범위한 사목적 책무가 따릅니다. 여기에는 양성, 인간 존엄의 수호, 교회의 사회 교리에 대한 교육, 그리고 섣부르게 대응하지 않는 다양한 전략들이 포함됩니다.


4. 문서의 진정한 새로움


이 ‘선언’의 진정한 새로움은, 곧 받아들이기 위한 관대한 노력을 요구하고 어느 한 사람도 이 내용에서 제외된다고 할 수 없는 이 선언의 참신함은 비정상적 상황에 있는 커플을 축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아닙니다. 이 선언이 참으로 새로운 점은 두 가지 다른 형태의 축복, 곧 ‘전례적 또는 예식화된 축복’과 ‘자발적 또는 사목적 축복’을 구별하라는 초대에 있습니다. 이 선언의 ‘소개’에서는 다음과 같이 명확하게 설명합니다. “이 문서의 가치는 축복의 사목적 의미에 대하여 구체적이고 혁신적인 기여를 제공하여 전례적 관점과 밀접하게 연결된 축복에 대한 고전적 이해를 넓히고 풍요롭게 해 준다는 것에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사목적 전망을 바탕으로 한 이러한 신학적 성찰은 교도권과 교회의 공식 문헌에서 축복에 대하여 언급된 내용에서 참으로 발전하였음을 의미한다.”


그 배경에는 교황님의 여러 문서에 나타나는 ‘대중 사목적 배려’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가 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교황님께서는 죄 가운데서도 일상생활에서 벗어나 마음을 열고 하느님께 도움을 청하는 하느님 백성의 단순한 신앙을 소중히 여기도록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이러한 까닭에, 비정상적 결합의 커플에 대한 축복과 관련하여, 본 신앙교리부의 문서는 답서나 서한보다 훨씬 많은 것을 드러내는 ‘선언’이라는 다른 형태를 채택했습니다. 특히 우리의 사목 관행을 풍성하게 해 주는 더 깊이 있는 사목적 실천으로 우리를 초대하는 이 문서의 중심 주제는, 축복에 대하여 그리고 이러한 사목적 축복을 활성화하자는 제안에 대하여 더 폭넓은 이해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목적 축복은 전례나 예식의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축복과 동일한 조건을 요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선언의 본문은, 여러 논쟁거리를 접어두고, 목자의 마음으로 모든 이념에서 벗어나 차분하게 성찰하려는 노력을 요구합니다.


일부 주교는 당분간 이러한 축복을 베풀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하겠지만, 우리는 다 함께 다음과 같은 확신을 키울 필요가 있습니다. 예식화되지 않은 축복은 축복받는 개인이나 커플을 축성하는 것도, 그들의 모든 행위를 정당화하는 것도, 그들이 영위하는 삶을 인정하는 것도 아니라는 확신입니다. 교황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목적 축복에 대한 더 폭넓은 이해를 키워 달라고 당부하시며, 사목적 친밀감의 이 단순한 몸짓을 실천하기 위하여 너무 많은 조건 부여를 요구하지 않는 축복의 방식, 가장 다양한 상황 속에서도 하느님에 대한 개방성을 촉진하는 수단이 되는 축복의 방식을 생각해 보라고 제안하셨습니다.


5. 이러한 ‘사목적 축복’은 어떻게 구체적으로 드러나는가?


전례적 또는 예식화된 축복과 명확히 구별되게 하려면 ‘사목적 축복’은 무엇보다 매우 짧아야 합니다(「간청하는 믿음」, 38항 참조). 예식서나 축복 예식서 없이 몇 초 동안 베푸는 축복입니다. 두 사람이 함께 다가와 축복을 청하면, 이 두 사람을 위하여 평화와 건강과 필요한 다른 선익을 주님께 단순히 청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그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온전히 충실하게 살아갈 수 있기를, 그리고 성령께서 하느님의 뜻에 맞갖지 않은 모든 것과 정화가 요구되는 모든 것에서 이 두 사람을 해방시켜 주시기를 청합니다.      


그 형식이 단순하고 간략한 이러한 형태의 예식화되지 않은 축복은 도덕적으로 용인될 수 없는 어떤 것을 정당화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이 축복은 혼인이 아니며, 마찬가지로 어떤 것에 대한 ‘승인’도 인준도 아닙니다. 이는 단지 한 사목자가 하느님의 도우심을 청하는 두 사람에게 주는 응답입니다. 그러하기에 이러한 경우에 사목자는 조건을 부과하거나 이 사람들의 내밀한 삶에 대하여 캐묻지 않습니다.


이러한 축복이 어떻게 가능하냐는 문제를 제기한 이들이 있기에 그 구체적인 사례를 살펴볼까 합니다. 대규모 순례단 가운데 이혼한 뒤 새로운 결합을 이룬 한 커플이 사제에게 이렇게 말한다고 생각해 봅시다. “저희를 축복해 주세요. 저희는 일자리를 찾을 수 없고 이 남자는 매우 아프며, 집도 없고 삶이 팍팍합니다. 하느님, 저희를 도우소서!” 


이러한 경우에 사제는 다음과 같은 단순한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주님, 주님의 이 자녀들을 굽어보시어 이들에게 건강과 일자리, 평화와 상부상조의 도움을 베풀어 주소서. 주님의 복음에 어긋나는 모든 것에서 이들을 구하시어, 이들이 주님 뜻대로 살아가게 하소서. 아멘.” 그러고 나서 두 사람에게 저마다 십자성호를 그어 주면서 마칩니다. 


우리는 10-15초가량 이어지는 그 무엇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축복을 청하는 이 두 사람에게 이러한 형태의 축복을 주는 일을 거부하는 것이 합당합니까? 크든 작든 그들이 지닌 믿음을 지지하고, 하느님의 복으로 그들의 약함을 도와주며, 그들이 복음에 더욱 충실하도록 이끌 수 있는 이러한 초월로의 개방에 통로가 되는 것이 더 적절하지 않겠습니까? 


오해를 피하고자 신앙교리부의 ‘선언’은 이렇게 덧붙입니다. “비정상적인 상황에 있는 커플이 이 축복 기도를 요청하였을 때, 비록 전례서에 규정된 예식을 벗어난 표현일지라도, 이러한 축복은 절대 사회적 결합 예식과 동시에 또는 그것과 관련하여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 또한 혼인의 고유한 예복이나 동작, 언어로도 이루어질 수 없다. 동성 커플이 축복을 요청할 때도 마찬가지이다”(「간청하는 믿음」, 39항). 그러하기에, 거룩한 건물 안의 중요한 자리나 제대 앞에서 축복을 줄 수 없다는 사실은 여전히 명확합니다. 이 또한 혼동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까닭에, 선언 「간청하는 믿음」을 통하여 모든 주교는 신중함과 배려가 필요하다는 점을 명심하면서 자기 교구에서 이러한 형태의 단순한 축복을 베풀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습니다. 그러나 전례 예식과 비슷한 축복을 제안하거나 베풀 권한은 결코 부여되지 않습니다.


6. 교리 교육


아마 이러한 형태의 축복은 그것을 간청하는 사람들이 영위하는 삶에 대한 인정이 아니라는 점을 모든 이가 이해하도록 돕는 교리 교육이 필요할 곳도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몸짓은 성사나 예식과는 거리가 멀기에 죄의 용서는 더더욱 아닙니다. 이는 사목적 친밀감의 단순한 표현으로서, 성사나 공적 예식과 똑같은 요건을 부과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 사제가 이러한 형태의 단순한 축복을 줄 때에 그가 이단이 아니며 그 무엇을 인준하지도 가톨릭 교리를 부정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이러한 형태의 축복은 개인이, 아무리 큰 죄인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믿음을 드러내도록 돕는 그저 단순한 사목적 통로라는 사실을 하느님 백성이 깨닫는 데에 우리가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이러한 까닭에, 축복을 청하러 자발적으로 함께 다가오는 두 사람에게 축복을 주면서 우리는 그들을 축성하고 있는 것도, 그들을 축하하는 것도, 그러한 형태의 결합을 인정하는 것도 아닙니다. 실제로, 개개인이 축복을 받을 때도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죄의 용서가 아니라 축복을 청하는 개인이 큰 죄인일 수 있지만 생존을 위하여 분투하고 있는 그에게 우리가 이러한 자부적 몸짓을 보이기를 거부한다는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좋은 교리 교육으로 이것을 명확히 한다면, 우리의 이 축복이 부적절한 무엇을 표현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해받을 염려 없이 자부적이며 친밀한 몸짓이 충만한 사목을 통해 더욱 자유롭고 아마도 더욱 친밀하며 더욱 풍성한 열매를 맺는 봉사자가 될 수 있습니다.


새로 나신 주님께서 모든 이가 거룩하고 행복한 2024년을 살아갈 수 있도록 아낌없는 은총의 복을 내려 주시기를 청합니다.  


장관 빅토르 마누엘 페르난데스 추기경

교리 부서 차관 아르만도 마테오 몬시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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