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가르침

교황 담화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제59차 홍보 주일 담화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5-04-22 조회수 : 61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제59차 홍보 주일 담화

(2025년 6월 1일)

여러분의 마음속에 지닌 희망을 온유하게 나누십시오

(1베드 3,15-16 참조)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허위 정보와 양극화가 특징인 우리 시대에, 소수의 권력층이 유례없이 방대한 데이터와 정보를 좌우하는 이때에 저는, 언론과 커뮤니케이션 종사자 여러분의 일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하면서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이웃에 대한 개인적, 집단적 책임을 커뮤니케이션의 중심에 두려는 여러분의 용기 있는 노력이 참으로 필요합니다.


올해 우리가 기념하고 있는 희년은 이 고난의 시기에 맞이한 은총의 때임을 떠올리며 저는 이 담화를 통하여, 여러분이 자신의 일과 사명을 복음 정신에 따라 쇄신하는 데에서 출발하여 ‘희망의 전달자’가 되도록 초대하고자 합니다.


커뮤니케이션을 무장 해제시키기


오늘날 커뮤니케이션은 너무나 빈번히 희망이 아닌 공포와 절망, 편견과 원망, 열광과 심지어 증오까지도 불러일으킵니다. 현실을 단순화시켜 본능적 반응을 촉발하는 일은 너무나 흔하고, 말로 비수를 꽂기도 하며, 심지어 거짓 정보 또는 인위적으로 왜곡된 정보를 이용하여 혼란을 일으키거나 선동하거나 상처 입히려는 의도가 담긴 메시지를 보내기도 합니다. 저는 커뮤니케이션을 ‘무장 해제’시켜 공격성을 정화할 필요가 있음을 여러 차례에 걸쳐 언급해 왔습니다. 현실을 구호로만 축소시키는 일은 결코 어떤 도움도 주지 못합니다. 우리 모두는, 텔레비전 토크쇼부터 소셜 미디어상의 언어적 공격에 이르기까지 경쟁, 대립, 지배욕과 소유욕, 여론 조작의 패러다임이 장악할 위험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또 다른 우려스러운 현상으로, 시장 논리에 따라 우리의 성향을 추적 분석(profiling)함으로써 우리의 현실 인식을 바꾸는 디지털 시스템을 통한 이른바 ‘프로그램화된 주의 분산’ 현상이 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일종의 관심의 원자화(atomization of interests, 역자 주: 개인의 취향과 관심을 인격 전체와 타인과의 관계에서 성찰하지 않고 세분화, 데이터화하여 공감과 연대보다 고립을 부추기는 현상)를 무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습니다. 관심의 원자화는 우리 공동체성의 토대, 곧 공동선을 위하여 함께 일하고 서로에게 귀 기울이며 서로의 관점을 이해하는 능력을 훼손해 버리고 맙니다. 따라서 자신을 내세우려면 비난하여야 할 ‘적’을 물색하는 일이 불가피해 보입니다. 그러나 타인을 ‘적’으로 삼는다면, 비아냥거리고 조롱하려 타인의 독자성과 존엄성을 무시한다면, 우리는 희망을 불러일으킬 가능성마저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토니노 벨로 주교의 가르침처럼, 모든 갈등은 “개개인의 얼굴들이 차츰차츰 사라질 때 시작됩니다.” 우리는 그러한 사고방식에 굴복해서는 안 됩니다.


희망하기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조르주 베르나노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습니다. “한때 안심하며 희망이라 착각했던 환상과 거짓말에 대하여 절망하는 용기를 냈던 사람들만이 희망할 수 있습니다. …… 희망은 뚫고 나가야 하는 위험입니다. 희망은 위험 중의 위험입니다.” 희망은 숨겨져 있지만 항구한 인내의 덕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희망하기는 선택사항이 아니라 필수 요건입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께서 회칙 「희망으로 구원된 우리」(Spe Salvi)에서 상기시키셨듯이, 희망은 수동적 낙관주의가 아니라 그 반대로 우리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실천적”(performative) 덕입니다. 곧, “희망을 가진 이는 다른 삶을 살게 됩니다. 희망하는 이는 새 생명의 선물을 받습니다”(2항).


우리가 지닌 희망에 관하여 온유하게 대답하기


“여러분의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거룩히 모시십시오. 여러분이 지닌 희망에 관하여 누가 물어도 대답할 수 있도록 언제나 준비해 두십시오. 그러나 바른 양심을 가지고 온유하고 공손하게 대답하십시오”(1베드 3,15-16)라고 한 베드로의 첫째 서간 말씀에서 우리는 희망을 그리스도인의 증언 그리고 커뮤니케이션과 연결 짓는 놀라운 종합을 발견합니다. 저는 이 말씀에서 길어 올릴 수 있는 세 가지 메시지에 대하여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거룩하게 모시십시오.” 그리스도인들의 희망에는 하나의 얼굴이 있습니다. 바로 부활하신 주님의 얼굴입니다. 성령의 선물을 통하여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겠다는 주님의 약속은 우리가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게 해 줍니다. 또한 모든 것을 잃은 듯한 순간조차도 침묵 안에 존재하는 감추어진 선(善)을 알아보게 합니다.


두 번째 메시지는, 우리가 지닌 희망에 대하여 대답하도록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닌 희망에 관하여 “누가 물어도” 대답하라고 하는 베드로 사도의 말씀이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주로 하느님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아니라 모든 것을 체험하는 새로운 방식인 그분 사랑의 아름다움을 되울려 퍼지게 하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체험한 사랑은 다음과 같은 물음을 불러일으키며 그에 대한 답을 요구합니다. 왜 여러분은 이렇게 살아가나요? 왜 여러분은 이렇게 존재하나요?


끝으로 우리는 베드로 성인의 말씀에서 세 번째 메시지를 발견합니다. 바로 이러한 물음에 대하여 “온유하고 공손하게” 대답하여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커뮤니케이션은 –그런데 저는 일반적인 커뮤니케이션도 마찬가지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여정의 동반자들이 나누는 대화처럼 온유함과 친밀함이 어우러진 것이어야만 합니다. 이는 온 시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소통가(communicator)이신 나자렛 예수님께서 택하신 방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함께 걸으시면서, 그들과 대화를 나누시고 일어난 일들을 성경의 빛으로 그들에게 풀이해 주시며 그들의 마음을 타오르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형제자매들과 나란히 걸으며 이 고난의 시대에 희망을 품도록 그들을 격려하는 길동무가 되게 할 수 있는 커뮤니케이션을 저는 꿈꿉니다. 바로 그것은 마음에 말을 걸 수 있고, 방어적이고 분노하는 격한 반응이 아니라 개방적이고 우호적인 태도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커뮤니케이션입니다. 절망적인 듯한 상황에서도 아름다움과 희망에 초점을 맞출 수 있고, 다른 이들에게 헌신하고 공감하며 관심을 가지게 할 수 있는 커뮤니케이션입니다. “모든 인간의 존엄성을 인식하며 우리 공동의 집을 함께 돌볼 수 있게”(「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217항) 우리를 도와줄 수 있는 커뮤니케이션입니다.


환상이나 공포를 조장하는 것이 아니라 희망에 관하여 대답할 수 있는 커뮤니케이션을 저는 꿈꿉니다. 마틴 루터 킹은 말했습니다. “내가 지나가는 길에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면, 한마디 말이나 노래로 누군가를 기운 내게 할 수 있다면, …… 제 삶은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자기 자랑과 자아도취라는 ‘병’을 치유하고, 다른 이들에게 자기 목소리만 들리게 하려고 소리 높일 위험을 멀리해야 합니다. 훌륭한 소통가는, 이야기를 듣거나 읽거나 보는 이들이 함께하고 친밀해지며 자기 장점을 찾을 수 있게 하여, 그들이 그러한 태도로 이야기 속에 확실히 몰입하게 합니다. 이와 같은 의사소통을 통하여 우리는 이번 희년의 주제인 ‘희망의 순례자’가 될 수 있습니다.


함께 희망하기


희망은 언제나 공동체가 함께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이 은총의 해가 얼마나 빛나는 메시지를 주는지 잠시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모두 –모두가 말입니다!- 새롭게 시작하라고, 하느님께서 우리를 들어 높이시어 품에 안으시고 우리에게 자비를 풍성히 베푸시도록 하느님께 우리 자신을 내어 맡기라고 초대받았습니다. 이 모든 것 안에 개인적 측면과 공동체적 측면이 한데 어우러져 있습니다. 곧, 우리는 함께 길을 나서고 많은 형제자매와 함께 순례하며 성문(聖門)을 함께 통과합니다.


희년은 많은 사회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몇 가지 예를 생각해 보면, 희년은 감옥에 갇혀 지내는 이들에게 자비와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고통을 겪으며 소외된 이들 곁으로 다가가 어루만져 주라고 호소합니다. 또한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마태 5,9)임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줍니다. 이처럼 희년은 우리에게 희망을 불어넣어 주고 대화의 길을 일러 줄 수 있는 사려 깊고 온유하며 성찰하는 커뮤니케이션을 요청합니다. 그러하기에 저는 여러분이, 작은 사금 조각을 찾아 쉼 없이 모래를 헤치는 사금 채취자들처럼 뉴스들 가운데 숨은 많은 미담(美談)을 찾아내고 알리는 데에 힘쓰도록 격려합니다. 이 희망의 씨앗들을 찾아내고 알리는 일은 참 아름답습니다. 그럼으로써 이 세상이 가난한 이들의 외침에 조금 덜 귀 막고 조금 덜 무관심하고 조금 덜 폐쇄적이게 도와줄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희망을 불어넣을 수 있는 선의 반짝임을 여러분이 언제나 발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와 같은 커뮤니케이션은 친교를 이루고 외로움을 덜어 주며 함께 걷는 것의 중요성을 재발견하도록 도와줄 수 있습니다.


마음을 잊지 마십시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저는 기술의 놀라운 성과에 직면한 여러분이 자신의 마음 곧 내적인 삶을 돌보도록 당부합니다. 이것이 어떤 뜻일까요? 저의 생각 몇 가지를 여러분과 나누겠습니다.


온유해지십시오. 그리고 다른 이들의 얼굴을 결코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일을 통하여 섬기는 사람들의 마음에 말을 거십시오.


본능적 반응에 좌우되어 커뮤니케이션을 하지 마십시오. 언제나 희망의 씨앗을 뿌리십시오. 그렇게 하기 어려울 때에도, 희생을 무릅써야 할 때에도,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하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그렇게 하십시오.


인류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커뮤니케이션 증진에 노력하십시오.


가냘프지만 인내하는 꽃처럼, 삶의 풍파에 꺾이지 않고 가장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꽃 피고 자라나는 진심 어린 신뢰를 위한 자리를 만드십시오. 자녀가 분쟁 지역의 참호에서 무사히 돌아오기 바라며 하루도 빠짐없이 기도드리는 어머니들의 희망 안에, 더 나은 미래를 찾아 큰 위험을 무릅쓰고 이주의 길을 떠나는 아버지들의 희망 안에 바로 그러한 자리가 있습니다. 전쟁의 잔해 속에서도 빈민가의 가난한 거리에서도 뛰놀고 웃으며 삶을 믿는 어린이들의 희망 안에 그러한 자리가 있습니다.


공격적이지 않은 커뮤니케이션을 증언하고 증진하는 사람들이 되십시오. 돌봄의 문화를 퍼뜨리는 데에 이바지하십시오. 다리를 건설하고 보이든 안 보이든 우리 시대의 모든 장벽을 허물어 버리십시오.


여러분이 희망찬 이야기들을 전하고 우리의 공동 운명에 관심을 기울이며 우리 미래의 역사를 함께 써 나가기를 바랍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이 모든 일을 여러분은 할 수 있고 우리도 할 수 있습니다. 이번 희년에 힘입어 우리에게 풍성하게 베풀어지는 하느님 은총을 통하여 이 모든 일이 가능합니다. 저는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과 여러분이 하는 일을 위하여 기도하고 축복합니다.


로마 성 요한 라테라노 대성전에서

2025년 1월 24일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프란치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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