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교회의 담화제16회 생명 주일 담화
제16회 생명 주일 담화
한국 사회의 입법 동향과 인간 생명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합니다”(사도 5,29)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인간 생명을 보호하고 존중해야 할 모든 이의 책임을 돌아보는 생명 주일이 제16회를 맞이하였습니다.
이번 생명 주일에는 특별히 생명에 관한 국가의 법률에 대하여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우리 사회에서 법률의 역할과 중요성을 부정할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사실, 법률이 국민에게 끼치는 영향은 매우 큽니다. 법률은 특정 행위를 허용하거나 금지하는 것을 넘어, 그 행위에 대한 국민의 인식과 사고방식에도 커다란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한국 천주교회는 국가의 법률이 모든 국민의 생명, 특히 자신을 방어할 힘이 없는 약한 이들의 생명을 보호해야 한다고 한결같이 촉구해 왔습니다. 무고한 인간의 불가침적 생명권은 “인간의 본성적 조건”이자 “시민 사회와 사회 질서의 본질적 요소”(「생명의 선물」[Donum Vitae], 제3부)로서 정부와 입법자가 개입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효과적으로 생명을 보호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법률은 “인간의 기본권을 인정하고 보호하며 평화와 공중도덕을 증진시킴으로써, 사람들의 공동선을 보장”(「생명의 복음」[Evangelium Vitae], 71항)하기 위하여 존재합니다.
무고한 사람의 생명권이 불가침의 성격을 지닌다는 것은, 이 생명을 침해하는 행위가 언제나 도덕적 악이라는 뜻입니다. 그런 행위는 정의와 애덕이라는 근본적인 덕에 위배됩니다. “그 무엇도 어느 누구도 태아든 배아든, 어린이든 어른이든, 노인이든, 불치병 환자이든 임종하는 환자이든, 무고한 인간의 살해를 허용할 수 없[으며]”, “누구도 자신을 위해서든 …… 타인을 위해서든, 이러한 살인 행위를 요청할 수 없[고]”, “어떤 공권력도 그것을 합법적으로 부과할 수도 허용할 수도 없[습니]다”(「가치와 권리」[Iura et Bona], Ⅱ).
이런 관점에서 오늘날 우리 사회에 심각한 우려를 불러일으키는 몇 가지 사항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첫째, 헌법 재판소가 낙태죄에 대하여 헌법 불합치 결정을 내린 뒤 형법상 낙태죄를 처벌하는 조항이 효력을 상실한 채 관련 법률 제정이 미비하여 “용인하기 어려운 법적 공백”(헌법 재판소, 형법 제269조 제1항 등 위헌 소원, 결정 요지)이 6년 넘게 지속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낙태의 자유화를 더욱 확고히 하려는 법률안이 지속적으로 발의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헌법 재판소는 태아의 생명권과 국가의 태아 생명 보호 의무를 결코 부정한 적이 없으며, “그 어떤 상황도 목적도 법률도 내재적으로 부당한 행위를 정당하게 만들 수 없습니다”(「생명의 복음」, 62항). 그런데도 이 법률안은 태아를 보호해야 할 국가의 책무를 포기하려 합니다.
둘째, 현대 의학으로 치료하기 어려운 말기 환자의 조력 자살을 합법화하려는 법률안이 발의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자살은 심각하게 부도덕한 행위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기 사랑을 거부하는 것이고, 이웃과 자신이 속한 공동체와 전체 사회에 대한 정의와 사랑의 의무를 포기하는 것[이며], 생명과 죽음에 대한 하느님의 절대적 주권을 거부하는 것”(「생명의 복음」, 66항)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이 법률안은 이런 자살 행위를 미화할 뿐만 아니라, 이런 행위에 다른 사람까지 끌어들여 돕게 함으로써 생명의 가치를 부정하게 만듭니다.
한쪽에서는 자기 결정권이라는 이름으로 낙태와 조력 자살과 같이 인간 생명을 파괴하는 행위를 ‘권리’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누구도 어떤 상황에서도 무고한 인간 생명을 직접적으로 파괴할 권리를 주장할 수 없[습니]다”(「생명의 선물」, 서론, 5항). 태아의 생명을 침해할 권리는 존재하지 않으며, 자신의 생명을 임의로 처분할 권리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 어떤 의료인도 존재하지 않는 권리의 집행자가 될 수 없[습니]다”(「새 의료인 헌장」[Nuova Carta degli Operatori Sanitari], 169항).
오히려 임신부가 건강하게 아이를 낳아 잘 기를 수 있도록 사회와 공동체의 지원을 받을 권리, 말기 환자가 마지막까지 평온하게 지낼 수 있도록 적절한 돌봄을 받을 권리가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불의한 행위를 합법화하려는 법안에 단호히 반대해야 합니다. 이런 법안은 “개인의 선뿐만 아니라 공동선에도 근본적으로 위배”(「생명의 복음」, 72항)되기 때문입니다. 정의롭지 않은 법은 법이 아니며(성 아우구스티노, 『자유의지론』[De libero arbitrio]), 바른 이성을 따르지 않는 법은 법의 타락이며 폭력입니다(성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 대전』(Summa Theologiae), I-II). 따라서 이런 법은 “양심에 아무런 구속력을 가지지 못하며, 오히려 양심적 거부를 통하여 이 법에 반대해야 할 중대하고 명백한 의무”(「생명의 복음」, 73항)가 생깁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모든 국민은 주권자로서 위정자들이 어떤 법안을 만들고 발의하는지 살펴보고 의견을 개진할 권리와 의무가 있습니다. 여기서 사도들의 담대한 증언을 기억하였으면 합니다.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합니다”(사도 5,29).
우리나라의 법률이 참으로 모든 국민의 권리를 보호하고 태아와 말기 환자 등 가장 약한 이를 보호하며 적절한 돌봄을 보장할 수 있도록, 그리고 내재적으로 부도덕한 행위가 합법화되는 일이 없도록 관심과 힘을 모아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성모님의 달 5월에 모든 어머니의 수호자이신 성모님의 전구로 주님의 사랑과 은총이 언제나 함께하기를 빕니다.
2026년 5월 3일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생명윤리위원회
위원장 곽 진 상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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