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백서帛書 125년 만에 도착한 편지
백서帛書
125년 만에 도착한 편지

판형_신국판(152×224)
면수_328쪽
발행일_2026년 7월 1일
ISBN_978-89-98891-07-7
분야_문학(역사소설)
출판사_ 책마실
1801년에 순교한 황사영은 가톨릭계는 물론이고 일반 역사에서도 오랫동안 뜨거운 감자였다. 그가 쓴 백서, 즉 교황에게 쓴 편지 때문이다. 백서에 무슨 내용이 담겼기에 황사영은 상반된 평가를 받는 가운데 아직 성인 반열에 오르지 못한 걸까? 이상훈의 소설 백서는 이 질문으로부터 구상의 실마리를 잡는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인 셈이다. 그렇다면 황사영의 편지 백서에는 어떤 내용이 담겼을까?
황사영은 백서에 1785년(정조 9) 이후의 조선교회 사정과 박해에 대하여 간단히 설명하고, 신유박해의 상세한 전개 과정과 순교자들의 약전을 적었다. 그리고 주문모 신부의 활동과 죽음에 대하여 증언한 다음 끝으로 폐허가 된 조선교회를 재건하고 신앙의 자유를 담보할 방안을 언급하였다. 그 방안이 바로 논란이 된다. 종주국인 청국 황제에게 청하여 조선도 서양인 선교사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하거나 아니면 조선을 청국의 한 성으로 편입시켜 감독하게 하거나 그도 아니면 서양의 배 수백 척과 군대 수만 명을 보내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도록 조선 조정을 굴복시키는 방안 등을 제시하였다. 압수한 백서에서 이러한 내용을 접한 정순황후 정권은 관련자들을 즉각 처형함과 동시에 천주교인들에 대한 탄압을 한층 더 강화하였다. 그런 가운데 백서의 사본이 청국에 전달되어 주문모 신부의 처형 사실이 알려질 것을 염려하여, 그해 10월에 파견된 동지사에게 진주사(陳奏使)를 겸하게 하여 신유사옥의 정당성을 설명하는 토사주문(討邪奏文)과 함께 황사영백서의 내용을 16행 922자로 대폭 축소하여 청나라 예부에 제출하게 하였다. 이른바 가백서(假帛書)다. 여기에는 청국에 관한 내용은 빼고 서양 군대 파견을 요청한 사실만 적어 박해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황사영백서의 원본은 1801년에 압수된 이후 줄곧 의금부에 보관되어 오다가 1894년 갑오경장 이후 옛 문서를 파기할 때 당시의 교구장이던 뮈텔 주교가 우연히 입수했다. 그리하여 1925년 한국 순교복자 79위의 시복식 때 로마 교황에게 전달되어 현재 로마 교황청 민속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광암 이벽으로부터 신앙의 세례를 받은 황사영의 깊고도 드높은 신심은 아내 정명련 마리아와 사촌처남 정하상 바로오에게 이어져, 혹독한 박해로 와해 상태에 이른 한국 천주교 부활의 밀알이 되었다. 작가는 바로 황사영백서가 지닌 의미를 이런 맥락에서 재해석하고 통찰하여 소설로 풀어낸 것이다.
작가는 당시 조선 정부가 악의적으로 편집한 ‘가백서’의 시각으로 황사영백서를 왜곡하면 안 된다는 통찰을 엄연한 사실과 역사적 배경에 기반하여 작품에 녹여냄으로써 황사영백서의 진정한 가치와 의의를 오늘에 되살린다.
■ 추천사
《백서》는 사람답게 살고자 천주의 사랑을 갈구하고, 그 사랑을 세상에 널리 퍼뜨리고자 하는 신앙의 뜨거운 연대와 희생의 처절한 서사를 담고 있습니다. 한국 천주교 복음의 시작을 정성으로 담아낸 이 작품에 하느님의 은총이 함께하기를 간구합니다.
_정순택 베드로 대주교(서울대교구 교구장)
2027 서울 세계청년대회를 참가하는 수많은 청년 순례자들은 한국 순교 성인들의 신앙을 발견하고 성찰하게 될 것입니다. 한국의 청년들이 이 책을 통해 우리의 소중한 순교 역사를 깨닫고 대회에 참여하는 전 세계 청년들이 순교 성인들의 숭고한 삶을 전하길 기도합니다. _이영제 요셉 신부(2027 WYD 기획본부장)
《백서》는 순교로 싹을 틔운 한국 천주교 태동의 역사를 다룬다. 그 중심에 선 조선 청년들의 거룩한 여정은 2027년 서울 세계청년대회에 깊은 울림과 영감을 줄 것으로 기대한다. 이 작품은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자생적 신앙공동체로 시작된 ‘K-가톨릭’이 세계의 청년들과 교회를 뒤흔드는 불쏘시개가 될 것이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전한다. 무엇보다 황사영과 그가 쓴 편지 《백서》에 대한 재평가가 돋보인다. _김진택 토마스 아퀴나스(한국천주교 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 회장)
■ 본문 중에서
백서를 쓰는 황사영의 심정을 가슴으로 느끼며 또 읽었다. 내가 황사영이 되고 황사영이 내가 되었다. 239년 전에 살았던 황사영이 내 안에서 다시 살아나는 것 같았다. 황사영은 천주교 순교자로 하느님을 위해 기꺼이 사지가 찢겨 죽는 순교의 길을 택했지만, 그는 천주교에서도 대접받지 못하고 우리 역사에서도 버림받은 존재가 되었다. 그가 외국 군대를 동원해서라도 조선에서 벌어지는 살육의 미친 춤판을 끝내 달라고 교황님에게 편지를 써서 보낸 일이 과연 역적으로 비난받을 행위일까? 당시 조선 백성의 삶과 정치 상황 그리고 천주교 박해의 실상을 안다면, 누가 황사영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까? (▶ 6쪽,〈작가의 말〉 중에서)
진복은 신부는 되지 못했지만, 항상 마음속에 하느님을 거부할 수 없었다. 그것은 7대조 할아버지의 혼령이 그를 따라다니는 것 같았다. 진복은 힘들 때마다 명례방이 있던 명동성당으로 가서 할아버지의 흔적을 찾았다. 당시 신자들은 조정의 추적을 피해 모임 장소를 명례방의 김범우 집으로 옮겼다. 그곳에서 조선 천주교회의 씨앗이 싹을 틔웠다. 그 명례방 모임의 주역은 이벽과 이승훈 그리고 정약용이었다. 사학자인 진복은 정약용 집안에 관심이 많았는데 정약용 집안은 천주교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의 울타리처럼 엮여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천주학을 학문이 아닌 종교로 받아들여 조선 천주교의 시발점이 된 인물은 광암 이벽이다. 그는 정약용 집안과 사돈 관계였는데, 이벽의 누이가 정약용의 큰형 정약현의 부인이 되었다. 그리고 정약현의 딸 정명련은 황사영과 혼인함으로써 황사영은 정약용 집안의 사위가 되고, 우리나라 최초의 영세자 이승훈은 정약용의 누이와 혼인함으로 정약용과 이승훈은 처남 매부 사이다. 최초의 순교자 윤지충은 정약용의 외사촌이었고 정약용의 작은형 정약종과 그의 아들 정철상은 천주교회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다가 순교했으며 정약종의 막내아들 정하상은 김대건 신부와 함께 우리 천주교회의 수호성인으로 지정되었다. 이렇게 보았을 때 한국의 천주교는 정약용 집안에 크게 빚지고 있다. 진복은 자신도 신부가 되지 못한 죄책감이 정약용이 천주교를 배교한 것과 중첩되어 가슴을 울리고 있었다. 배교로써 목숨을 부지한 정약용과 끝까지 믿음을 지키다 황사영백서 사건으로 능지처참을 당한 황사영의 얼굴이 대비되어 진복의 눈앞에 아른거렸다. (▶ 13쪽,〈황사영백서의 미스터리〉 중에서)
천진암에 모인 일행은 처음에는 서양의 사상과 기술에 집중하였다. 서양의 학문을 공부하는 가운데 이벽은 특히 천주교의 교리를 중시하였다. 이벽이 주도하는 천주학 강학 모임이 서서히 종교적 신앙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실학자들은 천주실의 책을 필사하여 나누어보며 천주학을 학문에서 신앙으로 발전시켰다. 그것이 최초의 한국 천주교 신앙의 시작이었다.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자발적인 신앙의 시작이었다. 한국 최초의 천주교는 1777년 이벽, 권철신, 정약전, 정약용, 이승훈 등이 경기도 광주의 주어사에 딸린 암자 천진암에 모여 천주학을 비롯한 서양 학문을 연구한 데서 시작된 것이다.
(▶ 25쪽,〈조선 천주교의 씨앗을 뿌린 이벽〉 중에서)
정하상이 일곱 살 때 황사영이 죽었지만, 정하상은 사촌자형 황사영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정하상이 아버지의 뜻을 이어 천주교를 조선에서 부활시키려고 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황사영이었다. 하상은 황사영이 교황님에게 보낸 백서를 찾아 헤매었지만,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1801년 신유박해 이후 좀처럼 부흥의 계기를 찾지 못하는 조선 천주교회를 위해 흩어진 교인들을 찾아내 신앙의 불길을 다시 태우게 하고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조직화하는 한편, 조선 천주교에 다시금 성직자를 파견해 주도록 북경 주교에게 계속 편지를 보내기로 했다. (▶ 214쪽,〈정하상, 황사영의 뜻을 이어가다〉 중에서)
1838년, 명련이 제주에 온 지 38년이 지났다. 고왔던 손은 부르트고 굳은살이 박여 이제는 영락없는 노비의 손이었다. 명련의 머리는 하얗게 서리가 내렸다. 육십 가까이 되자 이제 제주 사람들은 명련을 한양 할망으로 불렀다. 명련은 한양으로 떠나는 대정 현감의 배려로 독립해서 살 수 있는 외거노비로 인정받아 초가집에 혼자 살며 전교 활동을 계속하고 있었다. 명련의 외딴집에서 전해진 성경 말씀은, 바다에서 남편을 잃은 과부들과 희망을 잃고 살아가던 섬사람들의 마음에, 마른 수건에 물이 스며들듯 조용히 스며들고 있었다. 명련의 친구 간난이가 아주 열심히 전교 활동을 하여 명련을 따르는 신자들이 이백여 명에 이르렀다. (▶ 259쪽,〈정명련이 아들 황경한을 만나다〉 중에서)
황사영 묘에는 참배객이 끊이지 않았다. 황사영의 묘는 의정부교구 송추성당에서 관리하면서 무덤 주위에 십자가의 길을 세우고 무덤 옆에 작은 성당을 지었다. 진복이 황사영의 무덤 앞에 섰는데 마침 진복의 마음을 아는 듯 비가 내리고 있었다. 황사영 묘 앞에는 십자가의 길 기도를 드릴 수 있게 조그맣게 조성되어 있었다. 신자들이 황사영의 무덤 앞에서 십자가의 길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황사영의 길이 십자가의 길이었다. 진복은 무덤 앞에서 고개 숙여 기도하였다. 황사영의 죽음은 헛되지 않았다. 황사영의 피가 후손들에게 이어져서 오늘의 우리나라를 만든 것이다. 우리 순교자들의 피로 이루어진 우리나라의 교회는 세계가 부러워할 정도로 천주교 개신교 할 것 없이 예수님을 믿는 십자가로 대한민국 성공의 밑바탕이 되었다. 모두가 대한민국을 한강의 기적이라 이야기하지만, 이는 순교자들이 흘린 피의 기적이었다.
(▶ 316쪽,〈황사영의 무덤을 찾아서〉 중에서)
■ 차 례
머리말
황사영백서의 미스터리
사랑이 싹트다
조선 최초 천주교의 씨앗을 뿌린 이벽
최초의 영세자 이승훈
1784년 정약용, 정약전이 세례를 받다
명례방 사건
명례방을 찾다
사랑과 함께 찾아온 천주교
황사영, 세례를 받다
진산 사건과 신해박해
주문보 신부와 황사영의 첫 미사
1798년, 황사영의 아들이 태어나다
밀고 사건
정조의 사망과 노론의 대반격
정약종의 체포
1801년 신유박해
정약종의 죽음
주문모 신부 순교
황사영의 도피
황사영과 정약용과 정약전의 마지막 만남
배론 성지
살아남은 자의 슬픔
정약용의 번민, 정명련의 시련
추자도의 황경한
정하상, 황사영의 뜻을 이어가다
주역과 천주교
고향 마재를 떠나는 정하상
1836년 정약용, 하느님의 품에 안기다
정약용 생가와 마재 성지
조선 최초의 신학생 정하상
정명련이 아들 황경한을 만나다
1839년 기해박해와 상재상서上宰相書
앵베르 주교와 샤스탕, 모방 신부의 순교
수선화 꽃이 지다
정하상 바오로와 정난주의 무덤
125년 만에 전달된 편지, 황사영백서
황사영의 무덤을 찾아서
■ 작가 소개
이상훈
경남 밀양 출생으로, 마산고와 성균관대학교를 거쳐 서울대 행정대학원에서 수학했다. 첫 소설 《한복 입은 남자》가 10만 부 이상의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드라마와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이어 국내 최고의 뮤지컬 제작사 EMK에서 뮤지컬로 제작되어 연일 매진되는 대흥행으로 2026년 뮤지컬 대상을 수상했다. 이후 발표한 소설 《김의 나라》는 역사소설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류주현문학상(제16회)을 수상하였다. 또 소설 《제명공주》와 《테헤란로를 걷는 신라 공주》는 드라마와 뮤지컬 제작을 추진 중이고, 《칼을 품고 슬퍼하다》는 천재작가 최인호 역사소설의 맥을 잇고 있다는 찬사를 받으며 드라마 계약을 맺었다. 게다가 소설 《김옥균, 조선의 심장을 쏘다》는 베스트셀러에 진입하면서 영화로도 제작 중이다. 그 밖에 에세이집 《상식이 통하는 나라에 살고 싶다》,《유머로 시작하라》, 《더 늦기 전에 부모님의 손을 잡아드리세요》 등을 포함하여 20여 권의 책을 출간하였다. 작가로서 작품 활동과 프로듀서로서 방송 활동을 하는 가운데 문화 창달에 크게 이바지한 공로를 인정받아 한국방송대상, 한국프로듀서 대상, 문화관광부 장관상, 보건복지부 장관상, 자랑스런 한국인상, 류주현 문학상(제16회)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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